차가운 바람에는 비린내가 많이 나지 않았다. 해는 아직 수평선 너머에 있었고, 시커먼 하늘은 조금씩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앉고 싶었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주차장과 모래사장을 구분 짓는 연마석(?) 위에 걸터앉았다.
여기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지난밤 수백 킬로미터를 달렸다. 4시간 뒤면 회사 사무실내 내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데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지난 2시간 반 동안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박하맛 담배 한 개피와 해 뜨는 동해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바다가 있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수평선 부근이 차츰 옅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동이 트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평소 같으면 디카 렌즈뚜껑을 입에 물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가만히 기다리겠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뷰파인더를 거치지 않고, 두 눈으로 사물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진 찍는 걸 무척 좋아하지만, 가끔은 지금 사진을 찍고있는 이 행위가 사물을 제대로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 대학을 다닐 때 진짜 좋은 사진은 종이가 아닌 머릿속에 남기는 거라고 말 했던 교수님이 생각났다. 배낭여행을 다녔을 때를 기억해보면 서양인들은 동양인들, 특히 한국이나 일본사람들 만큼 사진 찍는데 몰두하지 않는 것을 종종 발견하기도 했다.
뒤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아주머니 한분이 이쪽으로 카트를 밀며 오고 계셨다. 동이 트는 것에 맞춰서 장사를 하러 오시는 것 같았다. 혹시 4년 전 이곳에 왔을 때 계셨던 분과 같은 분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해가 수평선을 가르며 꾸물꾸물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해 뜨는 동해를 바라보면서 담배한대 무는 것이 몇 시간동안 차를 달리면서 생각한 전부였다. 막상 생각했던 것 들을 다 하고나니 허탈해졌다.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물었다.
'여기서만'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오늘만'이라고 다시 생각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가 전혀 메스껍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담배를 배웠을 때 처럼 약간 몽롱한게 기분이 좋았다. 그 여세를 몰아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아직 다 피지도 않은 태양의 조각에 눈물이 났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맹렬히 태양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왠지 다시는 뜨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의 TV쇼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일어나, TV쇼에 출연할 준비를 할 시간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벌써 스튜디오로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출연하던 프로는 금일 잠정중단.
적당히 삶은 고동 향기가 느릿느릿 내 코를 간질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어디를 가던 가판대에서 파는 음식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번데기와 고동, 커피와 생수 등이 어디를 가던 볼 수 있는 품목이었다. 그 중에 고동은 참 이상한 음식이다. 내가 처음으로 고동을 발견한 곳은 어린 시절 시골 앞에 있는 강가에서였는데, 우리가족은 명절날이면 시골에 내려가 고동을 실컷 잡아서 삶아 먹고는 했다. 어딘가에서 양식을 하는 건지, 대한민국 어디를 가던, 항상 가판대 앞에 수북이 쌓여서 모락모락 김을 내는 고동을 볼 수 있었다. 순간 수 십 명의 어른들이 줄을 지어 허리를 숙여 강바닥을 헤집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고동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있는데 바로 맛이 없다는 거다. 아니, 너무 작아서 약간의 짠맛을 빼놓고는 뭔가 느껴지기도 전에 항상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컵을 사고 나면 너도나도 손을 내밀어 하늘색 비닐봉지를 껍질로 가득 채웠다. 같이 먹으면 뭔가 모르게 경쟁심리가 생기는 이상한 음식이다.
배고 고파졌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가까운 친척의 장례식장에 간 일이 있었다. 향을 올리고 난 다음에 사람들은 꼭 육개장을 먹고 갔다. 나도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계속 육개장을 먹으면서 고작 맛있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었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도, 나라가 멸망해도,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도, 뜨거운 사랑을 할 때도 결국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사람은 배가 고파진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빠도, 결국은 뭔가 입안에 집어넣고 만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되돌아본다.
밥은 죽은 이를 애도하고 산자를 재촉한다.
식탁에 놓인지 30초는 지났을 것 같은데도 해장국은 펄펄 끓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침에 커피 한잔과 굳이 뭔가 먹는다고 해도 구운 식빵 한 두 조각 정도를 먹었는데, 밤새 운전을 해서 그런지 뭔가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저 진한 해장국 속에 잠념마저 담가버리고 싶었다. 숟가락이 식탁에 하나만 놓여 있는 풍경이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다. 처음에는 그럴때마다 한 끼 정도는 그냥 먹지말자고 생각하며 넘기곤 했는데,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한 끼 식사로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등뼈 서너 조각에 특유의 진한 국물 맛, 그리고 들깨향기. 해장국 맛은 평이했다. 혼자 먹는 한 끼 식사지만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 식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수저를 들어 국물을 마시면서 최대한 음미했다. 식사의 목적은, 조리된 음식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생존과 맛의 음미이다. 그 외의 이유는 즐거움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적당히 고기와 국물을 먹고 나서 밥을 말았다. 그리고 가게에 있는 TV한번 쳐다보지 않고 꾸역꾸역 남은 음식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까 회사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났다. 시간은 벌써 7시가 넘었다. 지금부터라도 차를 쉬지 않고 몰면 적어도 점심시간 전에는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왠지 가기가 싫었다. 어떻게 온 속초인데, 하루만 더 있으면 토요일인데 이렇게 올라갈 수는 없었다. 월요일 회사에 가면 과장님의 벼락같은 잔소리와 응당한 처벌을 받겠지만 이렇게 올라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온 속초인데...
괜한 오기에 남기로 결심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특별히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없었다. 일단 눈이라도 조금 붙여볼까 해서 차에 올라서 해변 근처의 널찍한 자리에 차를 세웠다. 가능하면 주차장이 맘 편하겠지만 막상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 얼마 없었다. 카드로 주차비를 계산할 수 있는지 잘 몰라서 그냥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선루프를 열고 시트를 최대한 눕혔다. 천장에는 그림같은 파란 하늘이 무심하게 걸려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5년 전, 내가 대학교 4학년이었을 때였다. 1학년 때 망쳤던 영어회화수업을 재수강하던 도중, 클래스에서 가장 영어를 못했던 그를 만났다. 그 사람은 같은 4학년 이었는데도 고등학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그다지 눈에 뛰지도 않았고 관심이 가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하나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한 학기 내내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항상 말끔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한 학기를 마치고 내 학창시절의 마지막 여름은 찾아왔다. 그 해 여름은 취직준비 때문에 학원도 다니고 원서작성, 면접 준비 등으로 참 정신없이 지나간 방학이었는데, 마침 도서관에 반납하지 못한 책이 있어서 딱 한번 학교 도서관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부랴부랴 학교에 가서 1층 데스크에 책을 반납했다. 마감시간을 겨우 맞출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서 커피를 한 잔 뽑아서 도서관 앞 그늘진 계단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1년 남짓한 연애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남들처럼 영화를 보고 거리를 거닐고 가끔 근교로 놀러가는 것. 단 한 번의 여름에 딱 한번 바닷가에 놀러갔고, 단 한 번의 겨울, 그 끝에 다달았을 때에야 우리는 겨우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 근심을 모두 끌어안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은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이상형이라는 알고리즘으로 풀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사랑은 그 사랑이 끝나야 그 무게를 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스케치가 채 끝나지 않았던 20대 초반의 나는, 내 인생의 그 어떤 것에도 결말을 예견하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러나 경험에서 나오는 흐릿한 윤곽선은 우리의 만남이 결국은 시시한 다툼의 연속과 익숙함에 의해 막을 내릴 거라고 넌지시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범한 엔딩이 얼마나 속편하고 뒤탈 없는 것 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의 죽음도 짧은 인생 만큼이나 단순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던 중, 버스가 전복되고 말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어버렸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귓가에 속삭이는 영화같은 일 따위는 그의 마지막 가는 길 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보를 전해듣는 순간, 그가 조금 더 고통받더라도 나에게 마지막으로 말 한마디 할 시간 정도는 줘야하는거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 마저도 평범했다. 그리고 추억 외에는 가진것도 남긴것도 없었다.
매달 통장에 월급이 쌓이는 것을 볼 때마다, 늘어가는 숫자를 볼 때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가 생각났다. 어머니의 재테크가 성공해서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고, 아버지가 퇴직 대란에서 겨우 살아남고, 나는 전부터 가고싶었던 부서로 자리를 옮겼지만 마음속 빈자리에는 아직 새싹조차 돋아나지 않았다. 1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처럼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다.
약간 열어놓았던 창문 틈에서 들어온 차가운 기운에 잠에서 깼다. 헤드레스트에 땀이 흥건했다. 불편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잠을 잤던 탓인지 온몸이 뻐근했다. 일단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갓길 옆 낮은 건물들 사이로 가로등 빛을 머금은 검은 바다가 출렁거렸다. 바다가 꼭 제멋대로 뿌려놓은 끈적거리는 타르처럼 보였다. 하루 종일 잠을 잤건만 더욱 피곤한 나 말고는 모든 것이 건재했다. 도대체 몇 시인지 알아보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분명히 주머니에 넣어둔 기억이 나는데 분명 자면서 차 바닥에 흘렸던 것 같았다.
실내등을 켜고 운전석 주변을 살펴보았다. 핸드폰은 운전석 왼쪽의 조절레버 밑에 널부러져 있었다. 핸드폰을 집으려는데 진동이 한번 울렸다. 확인하지 않은 문자나 받지 못한 전화가 있을 때 나오는 기능이었다. 냉큼 핸드폰을 들어 확인을 했다. 전화 8통에 문자 3개. 집 2통, 회사 6통 그리고 스팸메일 3건이 내가없는 사이 핸드폰에 흔적을 남겼다. 어차피 내일은 토요일이라 그냥 조용히 있다가 출근하는게 나을 것 같아, 회사 사람들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걱정하실 것 같아서 문자 한통을 보냈다.
<엄마, 딸내미 잘 있음. 내일 돌아감. 걱정 뚝.>
내일 돌아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문자를 보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동해의 이름 모를 해변. 그 옆을 지나는 작은 아스팔트길에는 파도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파도소리는 똑같이 들리면서도 결코 똑같지 않은 음색으로, 잔잔하게 주위를 감쌌다. 언 듯 들으면 성난 군중들의 함성 같기도 하고, 그날 밤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던 내 목소리 같이 들리기도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이렇게, 정해진 트랙을 벗어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바로 잠자리에 들어도 피곤할 새벽2시, 컴퓨터 앞에서 멍하니 스크린세이버를 보고 있던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이 너무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언제쯤 그 지루한 제도권에서 빠져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트렁크를 열었다. 양말과 운동화를 모두 벗어서 트렁크 안에 넣었다. 그 안에서 뒹굴거리던 낡은 슬리퍼를 꺼내어 신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접어 올렸다. 트렁크를 닫고 차가 잘 잠겼나 레버를 당겨 확인했다. 자동차 리모컨을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천천히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혼자 속으로 알 수 없는 각오를 했다.
유명한 해수욕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으레 있을 청춘남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정하게 앉아있는 커플들을 보았다면 마음이 조금 심란해 졌을지도 모르겠다. 한발 한발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천국에 처음 발을 딛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사뿐하게. 어느새 쉼없이 밀려오던 파도가 두 발을 덮쳤다. 여름바다의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을 타고 돌았다. 발뒷꿈치부터 꼬리뼈까지, 그리고 꼬리뼈에서 뒷골까지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온몸 구석구석이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바다 저 멀리, 새하얀 하늘색의 불빛들이 하나 둘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불빛들은 점차 늘어났다. 불빛들은 수평선이 도로라도 되는 양, 그 위를 빼곡하게 채워갔다. 강렬한 하얀색 불빛들은, 어선 위 어부들의 삶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저마다 힘차게 하늘과 바다를 밝히며 장관을 일구어냈다. 커다란 블루지르콘 같은 모습. 너무 아름다워서 가질 수 없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눈이 조금씩 시려왔지만 일렁이는 바다의 빛깔을 지닌 보석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불빛을 핑계 삼아 눈시울을 붉혔다.
오징어잡이에는 미끼가 필요 없다. 아니, 미끼가 있다고 한다면 저 불빛이 바로 미끼였다. 어부들에게는 일을 하는데 필요한 불빛이 되고, 오징어들은 그 찬란한 불빛에 매료되어 본능적으로 달려든다. 앞과 뒤로밖에 가지 못하는 한계와 빛나는 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오징어는 일단 어선에 가까이 접근하고 나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보통은 그 짧디 짧은, 무심한 한 획이 곧바로 인생의 종지부가 되고 말았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키를 돌려ACC에 맞추고 라디오를 켰다. 서울과는 주파수가 달라서 듣고 싶었던 방송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하는 한 방송에서 멈췄다. 운전석 창문을 전부 내리고 다시 제각각의 색깔을 되찾은 주변 풍경 바라봤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와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한산했다. 어제와 오늘은 여전히 같은 필름을 상영하고 있었다.
쉼 없이 재잘거리던 진행자가 오늘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편안한 하루가 될 거라고 말 하며 방송을 접었다. 마무리 음악으로 부드러운 피아노곡이 흘러나왔다. 뭔가 알 듯 하면서 도무지 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는 곡 이었다. 왠지 커피를 마셔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창 밖 수평선 위에는 어디서 놀다 왔는지, 군데군데 회색빛 때가 낀 구름들 사이로 해가 반쯤 대지를 비추고 있있다. 라디오 진행자가 비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28초 정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가 왔으면 하고 내심 바랬다. 내 차가 생긴 후로부터, 비가 오면 MP3에 조용한 노래들을 가득 담아서 밖으로 나가곤 했다. 한적한 곳에 차를 대고, 엔진을 끈 후에 옆 사람과 노래를 들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걸 좋아했다.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차 안에 있으면 창밖의 풍경조차 보이지 않는 날. 그런 날은 그 좁은 경계가 세상의 끝인 것 마냥 느껴졌다. 평소에 이야기하지 못했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도 그 때만은 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한숨 푹 자고나니 배에서 또 다시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시동을 켜고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동안 해가 구름에 완전히 가려버렸다. 한참을 가다가 어딘지도 잘 모르는 작은 항구에 차를 댔다. 여기서 시장기를 해결하기는 해야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지갑을 챙겨서 바로 내리려다가 동승자 석에 그물에 넣어두었던 3단 우산이 생각났다.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은 우산을 챙겨서 내리기로 했다.
막상 내리고 보니 항구는 생각보다 컸다. 입구 쪽 큰 건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작은 건물들의 행렬이 쭉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항구는 생각보다 컸다. 천천히 구경을 하면서 항구를 돌아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항구였다. 여느 소항과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주택과 상점, 식당 그리고 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종의 시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구역에 다다르니 상인 아주머니들이 쭉 늘어앉아서 해산물을 팔고 있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다양한 물고기와 바다생물들이 적갈색 고무대야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을 뻐끔거리며 보내고 있었고, 바닥은 해수인지 수돗물인지 알 수 없는 물 때문에 질퍽거렸다. 여행객들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은 싱싱한 놈들을 찾아서 시장을 배회하다가, 맘에 드는 녀석들이 있으면 밑반찬과 조리만 전문적으로 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소한 회 한 점에 매운탕을 먹고 싶은 마음이 잠깐 일었지만 일행이 없는 관계로 관두기로 했다. 혼자 밥을 먹는것은 괜찮았지만 또 차로 기어들어가서 마냥 잠을 청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한기를 때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항구를 거의 빠져나왔을 때 쯤, 길 왼편에서 작은 새우튀김 행상을 발견했다. 새우튀김을 한 봉지 가득 샀다.
차에 올라서 다시 라디오를 켰다. 이번 프로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별로였다. 이왕이면 맘에 드는 방송을 들으며 새우튀김을 먹고 싶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아침방송이나 심야방송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눈을 밖으로 돌렸다. 앞에 보이는 것들은 주차장의 다른 차들 뿐이었다. 평소에도 라면을 끓인 후, 맘에 드는 TV채널을 찾는데 시간을 많이 소모하고는 했다. 튀김 봉지에 손을 대었다. 봉지에는 온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잠깐 이라면 운전을 해도 튀김이 눅눅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 시동을 켰다. 주차요금을 내고 차를 다시 경포대로 돌렸다. 별일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다행히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아서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시선을 도로에 고정한 채로, 라디오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진행자의 목소리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평소에 관리를 잘 안하는지 목소리가 많이 거칠었다. 오른손으로 더듬더듬, 라디오를 꺼버렸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 위 하늘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먹구름들이 몰려와서, 좀처럼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비가 온다는 확신이 들었다.
해변가 근처 공터에 그냥 차를 대었다. 새우튀김과 핸드폰, 그리고 우산을 다시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비가 오기 전에 튀김을 먹고 싶어, 적당한 자리를 찾아 해변을 향해 걸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를 힘껏 들이켰다. 바다향기와 비냄새가 동시에 콧속에 퍼졌다. 비가 내리기 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 새벽에 앉았던 자리에 다시 걸터앉았다. 해변은 대낮인대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가로웠다. 날씨가 흐린 까닭인지, 군데군데 보이는 연인들과 한 무리의 공놀이하는 아이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봉지를 조금 찢고 새우튀김 하나를 물었다. 새우튀김은 처음 머금었던 온기를 잃고 식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맛은 하나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기름에서 갓 건져낸 튀김보다 더 깊은 맛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이 배가 고팠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 하나 쉽게 넘기지 않았다. 한 마리 한 마리 꼭꼭 씹어, 맛을 느낀 후에야 삼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20마리가 들어있던 봉지 하나를 비워버렸다. 손에 올린 봉지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봉지를 동그랗게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그대로 앉아, 수평선을 바라봤다. 하늘은 반쯤은 새카맣고 반쯤은 흐린 회색빛깔이었다. 이곳에 온지도 하루가 지났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바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았다. 해가 보이지 않아서 지금이 몇 시 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나는 12시 36분을 지나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면 가족과 같이 식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막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갑자기 졸음이 싹 가셨다. 팔을 쭉 뻗어서 비가 오는지 확인했다.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깐 그대로 서서 비를 조금 맞았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비냄새를 한껏 마셨다. 주차장 바닥에서,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갔던 자동차들이 남기고간 흔적들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비릿한 도시의 채취와 바다향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잠깐 멍하니 비를 맞았다.
운전석에 앉아 브레이크를 밟고 키를 오른쪽으로 힘껏 돌렸다. 라디오를 켜고 운전석 열선 버튼도 눌렀다.
그리고 네비게이션 목적지를 동해시로 맞췄다. <끝>
------------------------------------------------------------------------------------------------------------심사평
사이버 문학 광장
7월 넷째 주 우수작
<일주일> newkid 님
<일주일>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신선한 비유와 안정적인 서술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장은 조금 불안했고, 간혹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도 감상적인 단어가 쓰인 부분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위 두 지적은 소설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고, 소설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결국 우수작으로 선정합니다. 즉흥적으로 떠난 속초의 바닷가, 그곳에서 보내는 무위의 시간(아마 1년 전 사고로 죽은 남자친구를 추억했겠지요, 정지된 듯 고요히 흘러가는 소설 속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자인 '나'와의 적정한 거리두기가 자칫 자기연민으로 빠질 수도 있었을 위험으로부터 소설을 구해냈기 때문입니다. 문체든 문장이든 내용이든 좀더 건조했어도 됐었는데 말이죠. 아니 사실은 좀더 많이.